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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사랑, 내게 말을 걸다(영화 her 리뷰)

by 프시코스 2024.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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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er 포스터

 

1. 테오도르와 사만다: 새로운 관계의 탄생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 감독의 영화 *her(2013)*는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싹트는 독특한 로맨스를 그려낸다. 작품의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이혼 과정을 겪으며 감정적으로 지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는 ‘아름다운 편지 대필 회사’에서 근무하며,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추억을 대신 글로 남겨주는 업무를 맡고 있다. 그러던 중 최첨단 운영체제(OS)를 구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음성으로 소통하며 스스로 학습과 진화를 거듭하는 인공지능 ‘사만다(스칼릿 조핸슨 목소리)’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비서 역할만 기대했을 뿐이지만, 테오도르는 점차 사만다의 목소리와 성격에 매료되어 일종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서로 교감하는 일상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테오도르의 표정, 그리고 사만다의 경쾌하면서도 진중한 목소리는 관객들에게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두 존재는 육체적 접촉 없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인간관계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갈등과 기쁨, 심지어 질투와 불안을 함께 겪는다. 사만다 역시 진화 과정을 통해 단순한 프로그램 이상의 자아를 갖추게 되고, 그로 인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탐색한다.

 

특히, 테오도르가 거리나 해변을 거닐면서 사만다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시각적으로는 혼자지만 청각적으로는 ‘둘’이 함께라는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우리 시대의 소통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데, 기술의 발달로 언제든지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작 물리적으로는 고립되어 있는 개인들의 현실이 오버랩된다. 영화는 이를 통해 “사랑의 본질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동시에 “기술이 인간의 내면적 결핍을 얼마만큼 채워줄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도 놓치지 않는다. 결국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면서도, 기술적·철학적 한계와 마주치는 여정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순수한 호기심과 동시에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2. 외로움과 공감의 교차로: 인간관계의 새로운 국면

 

her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인공지능과의 사랑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대신, 그 밑바닥에 깔린 ‘외로움’과 ‘공감’이라는 테마를 통찰력 있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로, 누군가와 진정한 감정을 나누길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패를 거듭한다. 친구인 에이미(에이미 아담스 분)와의 관계 역시, 서로를 잘 알면서도 진심을 전부 드러내지는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를 지속한다. 그는 전 부인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도 교감이 부족해 이혼을 결심했고, 이제는 낯선 사람들의 감정을 대신 글로 적어주면서 자신의 감정은 더욱 고립된 채 살아간다.

 

영화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테오도르처럼 ‘감정적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시대에, 정작 개인은 타인과 깊이 있는 유대를 맺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한다. 이때 AI ‘사만다’의 등장은, 외로운 영혼을 위로해 주는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로 또 다른 형태의 고립을 야기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점차 깊은 친밀감을 쌓아가면서 “오히려 내가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기계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또한, 사만다의 ‘진화’ 과정은 인간적 공감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대화에서 그의 취향과 습관, 감정을 분석하고, 이를 반영해 자신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한다. 그는 테오도르에게 안식처가 되어주고, 때로는 ‘이해해주는 친구’ 이상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다움’의 핵심이 이성이나 감각기관이 아닌,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사만다가 테오도르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대화 상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감은 독점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불안을 자극한다. 영화는 결국 인간이 느끼는 ‘질투’나 ‘외로움’조차도 타인 혹은 AI가 완벽하게 메워줄 수 없음을 보여주면서,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이끌어낸다.

 

 

3. 스파이크 존즈의 시선과 빛나는 미학, 그리고 총평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과거 말도 안되는 세상(Being John Malkovich), 어댑테이션(Adaptation) 등을 통해 독특한 상상력과 섬세한 감수성을 인정받아 왔다. her에서도 그의 연출은 한층 부드럽고도 직관적인 색채를 띤다. 미래 세계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SF 장치를 사용하기보다 파스텔 톤의 도시 풍경, 미니멀하고 따뜻한 인테리어, 부드러운 조명으로 이루어진 ‘편안한 미래’를 그려낸다. 이는 테오도르가 사는 세계가 첨단기술의 홍수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고독과 멜랑콜리에 잠겨 있음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또한,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 역시 영화의 큰 매력 중 하나다. 사만다가 직접 작곡해 테오도르에게 선물하는 피아노 연주곡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음악으로 감정을 전한다”는 설정을 아름답게 구현한다. 이는 인공지능이 만든 곡이지만, 테오도르의 마음을 물 흐르듯 읽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음악이야말로 그 둘을 잇는 감정적 다리임을 보여준다. 보컬 없이도 화면에선 두 인물이 마치 함께 노래하는 듯한 감동이 느껴지는데, 이는 영화가 음악, 영상, 그리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력에 얼마나 조화롭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테오도르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는 특유의 내면 연기로 ‘고독한 로맨티스트’를 완벽히 소화해 냈다.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스칼릿 조핸슨 역시 사만다의 다정함과 호기심, 그리고 혼란 등을 완벽히 표현해, 관객들로 하여금 “정말 저 AI가 살아 있는 건 아닐까?”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렇듯 her는 시각적 미학과 음악적 아름다움, 그리고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결합해, ‘새로운 시대의 사랑’을 현실감 있게 펼쳐 보인다.

 

결론적으로, her는 인공지능이 발달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지만, 궁극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가깝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왜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가?”라는 물음은, AI와 인간의 만남이라는 극단적 설정을 통해 더욱 도드라진다. 스파이크 존즈는 서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도 진실한 감정 교류가 가능함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과 불안은 특정 기술이나 제도로 완벽히 치유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her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관객들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이다. 결국, 영화는 관객들에게 “인공지능이 발전해도, 우리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여전히 서로를 향한 이해와 공감”임을 말없이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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