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배트맨 없는 고담, 현실을 직시한 비극의 탄생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Joker, 2019)*는 DC 코믹스의 대표적 악당 ‘조커’의 기원을 새롭게 그려낸 작품으로, 고담시가 아닌 현실에 더 가까운 사회적 배경을 통해 비극의 축을 단단히 세운다. 기존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대개 히어로와 빌런 간의 대립을 주요 얼개로 삼은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순전히 조커 혼자만의 서사를 내세워 ‘왜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나?’라는 물음을 관객에게 던진다. 배트맨(브루스 웨인)이 제대로 활약하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에 빠진 고담시의 민낯을 “한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환경”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 속 고담시는 빈부 격차와 부조리가 극에 달해 있으며, 범죄와 우울함이 만연한 ‘암울한 도시’ 그 자체다. 아서 플렉(조커가 되기 전의 본명)은 낮에는 광대 분장으로 사람들을 웃기려 애쓰지만, 실제론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정신과 상담 지원이 끊기고, 자신을 홀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외톨이로 지내야 하는 처지는 그를 더욱 절망으로 몰고 간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러한 환경 묘사를 “슈퍼히어로적 과장”이 아닌, 1970~80년대 뉴욕의 축소판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단순히 만화 속 도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와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영화는 “웃음을 주는 광대지만 정작 본인은 고통받는” 주인공의 처지를 통해, 우리가 가진 ‘조커’에 대한 인식을 뒤흔든다. 이 캐릭터는 기존 DC 유니버스에서 “광기와 혼돈을 상징하는 빌런”으로 그려졌지만, 여기서는 “사회에서 소외된 개인이 어떻게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하는 드라마로 자리 잡는다. 그런 점에서 *조커(2019)*는 범죄 스릴러이자 심리 드라마, 그리고 사회적 비판 영화의 성격을 두루 아우르며 관객에게 불편하고도 날카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2. 호아킨 피닉스의 몸짓과 광기: 캐릭터 완성의 정점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호아킨 피닉스의 압도적인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아서 플렉—훗날 조커가 되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20kg 가까운 체중 감량을 감행했으며, 극도로 예민하고 비틀린 몸짓과 웃음소리를 선보인다. 그의 웃음은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질병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통제 불가능한 발작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 이 웃음이 바로 아서가 겪는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상징하고, 동시에 “주변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사회적 낙인”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피닉스는 걸음걸이나 눈빛, 그리고 등을 구부리는 독특한 자세까지 모두 캐릭터에 녹여내어, 스크린에 등장하는 내내 ‘불안정함’을 자아낸다. 아서는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웃음을 줘야 하는 광대”지만, 실은 누구보다 절망적이고, 스스로 웃음을 찾을 길이 없는 인물이다. 이 인물의 변화가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때, 관객들은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끔찍한 악행이지만, 어쩐지 이 사회가 그를 몰아붙인 것 같은 죄책감.” 이 모호한 감정이야말로 조커가 “악당의 기원”을 단순한 악의 탄생이 아닌, 비극의 귀결로 그려낸 이유다.
또한, 피닉스의 절정은 아서가 완전히 ‘조커’로 각성하는 순간, 뒷골목에서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이 장면은 압도적인 비주얼과 어둠 속의 광기, 그리고 “자기 해방의 무도(舞蹈)”를 상징한다. 이미 인격의 파탄을 넘어선 상태지만, 이상하게도 관객들은 그 춤사위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호아킨 피닉스는 바로 이 양면성을 표현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조커 역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3. 심각한 사회 현실과 허무의 메시지: 우리는 모두 공범인가?
*조커(2019)*는 “고담시”라는 DC 세계관을 빌려 왔지만, 사실상 현실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에 가깝다. 영화 내내 아서 플렉이 겪는 차별과 빈곤, 정신보건 체계의 미비는 “누구도 그를 구원할 수 없는 사회적 병리”를 상징한다. 특히 정신과 상담 프로그램이나 약물 지원이 예산 삭감으로 중단되는 설정은, 실제 사회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복지 사각지대” 문제를 꼬집는다. 영화가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을 적지 않게 보여주는데, 이는 “잔혹함으로 점철된 이 사회가 사실은 우리 모두가 방치하고 있는 현실”임을 강변하기 위함이다.
아서 플렉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반(反)부자 운동’의 불씨가 되고, 고담 전역에서 광대 마스크를 쓴 시위가 벌어진다는 전개는, “부유층과 빈곤층, 기득권과 소외계층” 간의 갈등이 어찌 보면 작은 사건을 발단으로 일파만파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감독 토드 필립스는 이를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하며,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아서가 TV 쇼에 출연해 마지막으로 내뱉는 대사는, 사회적 냉소가 극단에 치달았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극적으로 시각화한다.
결국, 영화가 내비치는 결론은 “조커가 개인적 문제로만 끝나는 악당이 아니라, 집단적 무관심과 왜곡된 가치관이 빚어낸 괴물”이라는 점이다. 관객들은 불편하지만, “조커를 만들게 된 건 바로 우리 모두가 아닌가?”라는 자문을 하게 된다. 감독은 범죄를 정당화하려 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 사회가 정신질환 환자나 빈곤층을 제대로 돌봐 줬다면 아서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는 암시를 강력하게 남긴다. 이로써 조커는 슈퍼히어로·빌런 영화의 범주를 넘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우울하고도 처절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사회파 드라마’가 된다.
결론: 광기의 배후에 놓인 절망, 우리 모두의 책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Joker, 2019)」**는 DC 코믹스의 명물 빌런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전형적인 히어로·빌런 서사를 벗어나 “한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절망에 빠져 폭력과 광기를 발산하게 되는가?”를 심도 있게 다룬 문제작이다. 호아킨 피닉스는 광대 아서 플렉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사회의 냉정한 외면이 개인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전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가 배트맨 시리즈와 연결되는 면모도 있지만, 사실상 배트맨의 존재는 중요치 않다. 초점은 전적으로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길고도 어두운 여정”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비주얼은 음산하고 무겁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1970~80년대 뉴욕 분위기가 엿보이는 고담시는 쓰레기와 범죄, 빈부격차로 뒤덮여 있으며, 이곳에서 광대 분장을 한 아서 플렉이 춤을 추는 모습은 기괴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동시에, 이 춤은 “사회의 부조리에 짓눌려온 개인의 최후 비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과연 누가 괴물인지—아서인지, 아니면 그를 몰아붙인 사회 전체인지—혼란스러워지며 죄책감마저 느낀다.
마지막에 이르러 아서가 완전히 조커로 탈바꿈한 뒤 벌어지는 고담시의 폭동 장면은 “하나의 희극이 곧 집단적 비극”으로 전환되는 선명한 단면을 보여준다. 동시에, “조커”라는 캐릭터가 수많은 이들에게 “억눌린 분노를 해소하는 상징”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조커(2019)*는 이렇듯 “개인 한 명의 미치광이 서사”를 통해 전 사회적 병리 현상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으며, 극장을 나온 뒤에도 “우리 사회가 조커의 탄생을 부추긴 건 아닐까?”라는 물음을 떨칠 수 없게 만드는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는 슈퍼빌런을 재해석하는 데 있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과 해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