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좀비 재난의 새로운 장을 열다
영화 부산행은 2016년 개봉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던 ‘좀비 재난’ 장르를 본격적으로 선보이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물론 이전에도 괴수나 감염병을 소재로 한 작품이 존재했지만, 제대로 된 스케일과 액션, 그리고 사회적 메타포까지 아우르는 좀비물이 국내에서 이처럼 대중적 호응을 얻은 경우는 드물었다. 연상호 감독 특유의 과감하면서도 현실적인 연출이 돋보이는데, 이는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사이비> 등을 통해 이미 드러났던 감독의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을 실사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행은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상황을 전개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부여한다.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좀비로 만드는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주인공과 동승객들이 탄 KTX 열차는 이동 자체가 재앙이 되어버린다. 기존 좀비물이 지닌 서양 특유의 폐쇄된 공간(대저택, 작은 마을 등)을 한국적인 공공 교통수단인 ‘기차’로 바꾼 설정은 매우 참신하다. 이 한정된 이동 수단 안에서 발생하는 위기감은, 지루함을 느낄 틈 없이 한순간의 부주의에도 생사가 뒤바뀔 수 있다는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또한 <부산행>은 “좀비의 ‘인간성’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좀비화된’ 이기심”을 부각하는 쪽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좀비보다 무서운 것은 인간이다”라는 감상을 내놓았는데, 이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영화 전반에서 시종일관 강조되는 테마다. 열차 안에서 펼쳐지는 군상의 심리는 극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희생정신을 택하는 인물이 빛나면 빛날수록, 반대로 생존을 위해 타인을 배제하고자 하는 모습은 더욱 섬뜩하고 실감 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극한의 대립이 결국 개개인의 인간성의 깊은 곳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부산행이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단지 좀비 장르의 화려한 액션 때문만은 아니다. 좀비라는 공포의 아이콘을 통해 한국 사회가 공감할 만한 공포와 이기심, 그리고 미묘한 휴머니즘을 절묘하게 섞어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화는 관객들에게 역동적인 쾌감과 더불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데 성공했다.
2. 인간 군상의 희로애락 속에 깃든 메시지
열차 안에 갇힌 주인공 일행의 사투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넘어, 인간 군상이 모여 이뤄진 작은 사회가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무대로도 볼 수 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만큼, 그 안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은 일종의 축소된 사회 단면을 이루고, 관객들은 각각의 인물이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비추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시장에 몰두하며 바쁘게 살아가던 석우(공유 분)는 극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자신과 딸의 안전만을 우선시하지만, 점차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쪽으로 변모한다. 이는 인간이 가진 양면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사례다. 한편, 상화(마동석 분) 캐릭터는 평소에는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아내를 위한 헌신과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태도로 인해 오히려 가장 ‘사람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처럼 인물들은 극단적 상황 속에서 자신 안에 잠재된 이타심과 이기심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고, 관객들은 그 과정을 통해 함께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며 감동받는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인간이 만들어내는 ‘군중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는 것이다. 열차 내부가 한순간에 ‘안전 구역’과 ‘위험 구역’으로 나뉘게 되면,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 구역을 사수하려는 공포와 편견에 빠지기 쉽다. 곧 “저 사람들을 태우면 우리도 위험해진다”는 식의 논리가 무섭게 확산되고, 다수의 힘에 눌린 소수는 밀려나거나 희생양이 된다. 이런 현상은 실제 사회에서도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공동체가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오히려 서로를 돕기보다 배척함으로써 더 큰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경고해 준다.
결국 부산행은 단순한 재난·좀비 영화 이상의 지위를 획득한다. 재난 속에서 인간 군상이 어떻게 서로를 대하고, 어떤 가치를 지켜나가며, 무엇을 희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격렬하고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스릴과 공포만이 아닌, 희생·우정·부성애 등 다양한 감정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되며, 스스로에게 “나는 이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3. 액션과 감성의 탁월한 조화, 그리고 여운
부산행이 남긴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는, 액션과 감성을 적절히 조율하며 극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좀비 영화에서 관객들은 폭력적이거나 잔혹한 장면 위주의 긴장감, 혹은 독보적인 세계관에 집중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열차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속도감 넘치는 액션만큼이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애틋한 감정선에도 상당한 비중을 둔다.
영화의 전반부부터 빠른 편집과 강렬한 충격을 주는 장면이 쉴 새 없이 펼쳐지지만, 그 틈틈이 인물들의 감정선이 차분히 구축되는 것이 눈에 띈다. 석우와 딸 수안(김수안 분)의 관계는 영화 내내 ‘부성애’의 축을 담당하며, 위기의 순간마다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어쩌면 그 어떤 비장한 희생 장면보다도, 딸에게 미처 해주지 못했던 마음을 뒤늦게나마 표현하고, 딸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선택을 하는 모습이 관객들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더해, 상화와 성경(정유미 분)의 케미 역시 커다란 역할을 한다. 서로 다른 성격과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함께 힘을 합쳐 역경을 헤쳐 나가는 과정은, 거칠면서도 진솔하다. 특히 상화의 캐릭터는 영화의 액션 파트에서 중요한 비중을 담당함과 동시에, 인간애의 핵심을 관통하는 인물로도 손색이 없다. 이는 연상호 감독이 애니메이션 때부터 즐겨 다뤘던, 주변부 인물들의 숨어있는 진정성에 대한 관심이 실사로 잘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액션과 감성을 균형 있게 배치한 덕분에, 부산행은 단순한 재난 블록버스터를 넘어 ‘인간 드라마’로서도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들은, 극 중에서 보여준 수많은 희생과 눈물,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상처를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동시에 피어오르는 희망의 불빛은,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새기게 만든다.
결국, 부산행이 한국 좀비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액션과 스릴, 감동과 휴머니즘을 골고루 갖춘 작품으로써, 국내외 관객들에게 “좀비물도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연상호 감독을 단숨에 월드클래스 감독으로 견인했고, 한국 영화 시장에 대한 해외의 관심을 높이는 데에도 일조했다. 그만큼 부산행은 기존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성”을 설득력 있고 감동적으로 표현해 낸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후 여러 작품들이 시도한 K-좀비 흐름의 시발점이자, 전 세계 영화 시장에서 한국형 재난 영화의 경쟁력을 증명한 사례로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